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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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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복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4:17) 또한 갈릴리 온 지방을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마태복음 4:2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5)  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의 복음의 중심은 죄 사함 자체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 였다. 예수님은 죽어서 가는 장소를 먼저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왕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셨음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통치란 무엇인가? 세상 나라는 사람의 욕심과 죄가 다스리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10)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을 억압하는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사랑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마태복음 11장 12절이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태복음 11:12) 누가복음은 같은 내용을 이렇게 기록한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힘써 들어가느니라." (누가복음 16:16) 누가복음은 초점을 천국이 공격받는 데 두기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힘써 들어오는 모습에 두고 있다. 세례 요한 이후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자 이전까지 하나님께...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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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복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4:17) 또한 갈릴리 온 지방을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마태복음 4:2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5)  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의 복음의 중심은 죄 사함 자체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 였다. 예수님은 죽어서 가는 장소를 먼저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왕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셨음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통치란 무엇인가? 세상 나라는 사람의 욕심과 죄가 다스리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10)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을 억압하는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사랑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마태복음 11장 12절이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태복음 11:12) 누가복음은 같은 내용을 이렇게 기록한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힘써 들어가느니라." (누가복음 16:16) 누가복음은 초점을 천국이 공격받는 데 두기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힘써 들어오는 모습에 두고 있다. 세례 요한 이후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자 이전까지 하나님께...

천국을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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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4:17)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죽은 후에 들어갈 장소인 천국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미래에 들어갈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의 마음과 삶 가운데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외적인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만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치하실 때 이미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도 이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10)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먼저 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먼저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고 원하는 것들을 얻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환난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

성령과 함께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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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분별,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 많은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품는다. "지금 내가 선택하려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가?" 누군가는 "성령께 기도하면 알 수 있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성경을 보면 답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고민과 토론, 그리고 분별의 과정을 거쳤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도 양심을 따라 살았다. 바울은 대제사장 앞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 (사도행전 23:1) 놀라운 것은 이 말이 예수님을 믿은 이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었다. 그는 교회를 핍박했고, 스데반의 죽음을 옳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완전히 반대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도 그는 말한다. "나는 항상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이 말은 양심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양심은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것에 대해 정직하게 반응하는 내적인 증인 이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면 양심의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 > 사도들도 서로 달랐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음에도 서로 의견이 달랐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을 의식하여 이방인들과 식사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것이 복음에 어긋난다고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갈라디아서 2:11-14)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인지를 두고 심하게 다투었고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사도행전 15:36-41) 예루살렘 교회 역시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해야 하는가를 두고 큰 논쟁이 있었다. (사도행전 15장) 만약 성령의 뜻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즉시 ...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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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삶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내가 저희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4-15) 예수님의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는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을 떠나는 삶으로 생각한다. 세상과 단절하고, 사회와 거리를 두며, 죄를 피하기 위해 모든 위험한 환경을 떠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전혀 다른 방향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악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달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삶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속으로 보내지 않으셨다. 세리는 세상 속으로, 어부는 세상 속으로, 의사는 병든 사람에게,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자리에서, 농부는 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살아가도록 하셨다. 복음은 세상을 버리는 종교가 아니다. 복음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 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14) 빛은 어두운 곳에 있어야 빛이다. 소금은 음식 속에 들어가야 맛을 낸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사람이다. >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 예수님은 "세상에 있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세상에 속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세상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자리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살아가...

성경을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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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습니다. 교회에서도 성경 읽기를 권장하고, 개인적으로도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같은 성경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방법만 찾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성경이 달라서가 아니라 성경을 읽는 목적 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찾도록 가르치셨지만,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결국 성경을 읽는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되면, 성경은 자연스럽게 기복적인 책으로 읽히게 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이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 직전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마태복음 6:32)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과 같은 삶의 필요를 염려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가장 큰 목적이 될 때, 예수님은 그것을 이방인의 삶과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가장 먼저 구하는 사람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다음 말씀을 자신의 소원 성취의 약속으로 이해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7) 하지만 이 말씀은...

성령의 마음에 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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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부인과 십자가로 시작되는 그리스도인의 삶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복잡한 신학으로 답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매우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이 한 구절 안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 1. 자기부인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부인을 자신을 미워하거나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자기부인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자기부인이란 내 생각과 욕심을 앞세우지 않고, 성령의 말씀을 먼저 듣고자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향해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39) 예수님은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구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자기부인의 가장 완전한 모습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선택의 순간을 만납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먼저 '내 생각이 무엇인가?' 가 아니라,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를 묻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은 내 생각을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을 듣고자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선택하는 삶의 자세 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진 사람은 점차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 2.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자기부인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십자가는 단순히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면 억지로 용서하려 애쓰기보다 용서...

표적을 본 사람과 떡을 먹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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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적을 본 사람과 떡을 먹은 사람 –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이끄는 성령의 길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자신을 찾아온 무리들에게 매우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한복음 6:26)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단순히 "기적만 보고 따라온 사람들"에 대한 책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용하신 단어는 '기적'이 아니라 '표적(σημεῖον, 세메이온)' 이다. 표적은 목적이 아니다. 표적은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표시 이다. 도로의 표지판은 목적지가 아니며, 목적지를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적이 가리키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표적이 가져다준 결과만 바라보았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 표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오병이어는 단순히 배고픈 사람을 먹이기 위한 사건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어서 말씀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요한복음 6:35) 사람들은 떡을 보았지만, 예수께서는 생명 을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육신의 배부름을 경험했지만,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기적을 원했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원하셨다.  결국 오병이어는 떡의 기적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표적 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신 후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7) 인간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욥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

왕 같은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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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랑으로 섬기는 삶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많은 사람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왕의 권세와 영광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래서 성도가 왕처럼 다스리고, 권세를 누리며,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왕 같은 제사장'은 세상의 왕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왕 같은 제사장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사람 입니다. > 구약의 제사장과 신약의 제사장 베드로는 출애굽기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애굽기 19:5-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역할을 맡았고,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제사장과 왕은 서로 다른 직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두 직분은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왕이시며, 동시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도 그분의 생명에 참여함으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됩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은 제사장을 종교적인 직분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제사장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

신부에서 아들로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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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오늘날 일부 신흥 종교에서는 인류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구약 = 하나님(성부) 시대 신약 = 아들(성자) 시대 현재 = 성령 시대 또는 신부 시대 그리고 이러한 시대 구분을 근거로 "예수님의 시대는 끝났으며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다.", "새로운 목자가 나타났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 구분은 과연 성경이 말하는 구속사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일까요?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이러한 삼시대론은 성경의 명확한 교리가 아니라 후대에 형성된 역사 해석이며, 특히 오늘날 일부 신흥 종교에서는 이를 더욱 확대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1. 성경은 시대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성경은 분명히 옛 언약과 새 언약 을 구분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붓는 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라." (누가복음 22:20) 또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누가복음 16:16) 즉, 성경은 율법 새 언약 복음 이라는 구속사의 흐름을 말하지만 성부 시대, 성자 시대, 성령 시대라는 시대 구분은 하지 않습니다. > 2. 삼위 하나님은 시대별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삼시대론의 가장 큰 문제는 성부는 구약, 성자는 신약, 성령은 현재 라는 식으로 이해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하나님의 영도 창조부터 함께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말씀(성자)도 태초부터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 따라서 창조부터 성부, 성자, 성령은 함께 역사하셨습니다. > 3. 구약에도 성령은 계속 역사하셨...

성경 속 종, 아들, 신부의 진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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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아들, 신부는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라." (요한복음 15:1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4)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요한계시록 21:9) 들어가는 말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종' 이라고 부르시고, 어떤 곳에서는 '아들' , 또 다른 곳에서는 '신부' 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듣기도 합니다. "구약은 종의 시대이고, 신약은 아들의 시대이며, 마지막은 신부의 시대이다." 또는 "종은 하나님이 사람을 낮은 차원으로 대하던 시대이다." 과연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은 '종', '아들', '신부'를 시대의 구분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여 주는 표현 입니다. > 1. 하나님은 왜 사람을 '종'이라고 부르셨을까? 오늘날 "종"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노예"를 떠올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종이라고 부르셨다고 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노예처럼 부르셨구나."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의 생각을 성경에 넣어 해석한 것 입니다. 성경 시대의 종은 우리가 생각하는 노예와 조금 달랐습니다. > 2. 성경의 '종'은 한 가지 뜻이 아니다 구약에서 "종"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에베드(עבד) 입니다.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됩니다. 실제 종 하인 신하 왕을 섬...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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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하거나 복음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인용하는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대부분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신다는 성경 전체의 메시지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장 20절 자체의 문맥을 살펴보면, 이 구절은 불신자가 아니라 이미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 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요한계시록은 누구에게 기록되었는가?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요한계시록 1:4) 또한 예수님께서는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각각 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요한계시록 3:14) 즉, 요한계시록 3장 전체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 를 향한 말씀입니다. >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매우 엄하게 책망하십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요한계시록 3:15-16)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요한계시록 3:17)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요한계시록 3:17)...

창조부터 새 언약까지 성령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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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부터 새 언약까지 성령의 역사 들어가는 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고, 믿지 않으면 성령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차근히 읽어 보면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정말 하나님의 영은 신약 시대에 처음 오셨는가? 정말 하나님은 기독교인에게만 함께하시는 분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영은 누구의 영이었는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사실을 증언한다. 하나님의 영은 창조부터 역사하셨으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다. > 창조의 시작은 하나님의 영이었다. 창세기 1장 2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을 처음 소개한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세상이 아직 질서 있게 만들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의 영은 이미 역사하고 계셨다. 또 창세기 2장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기서 생기는 단순한 산소가 아니다. 히브리어로는 니쉬마트 하임(נִשְׁמַת חַיִּים) , 곧 생명의 호흡 이다. 욥기 33장 4절은 이를 더욱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호흡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다. 신약에서도 바울은 같은 사실을 선포한다. 사도행전 17장 28절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바울은 이 말을 유대인에게 한 것이 아니다. 헬라 철학자들이 모여 있던 아레오바고에서 모든 사람을 향해 선포하였다. 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특정 종교인의 특권...

전도서의 헛됨 헤벨은 허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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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서의 '헛됨(헤벨)'은 허무가 아니다  전도서를 읽다 보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단어가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으며 전도서가 인생을 비관하고, 삶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서를 '허무주의의 책'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면 전혀 다른 의미가 드러납니다. 전도서에서 '헛됨'으로 번역된 단어는 헤벨(הֶבֶל, Hevel) 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숨결(Breath) 입김(Vapor) 안개(Mist) 잠시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수증기 즉 존재하지 않는 것 이 아니라 잠시 존재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것 을 의미합니다. 전도서는 세상이 의미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영원히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세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 헤벨은 허무가 아니라 '덧없음'이다 우리는 겨울 아침 입김을 내쉬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잠시 보이다가 금세 사라집니다.붙잡으려고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습니다. 헤벨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음도, 건강도,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시간도 모두 잠시 우리에게 맡겨질 뿐 영원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전도서는 이것을 보고 "모든 것이 헤벨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서의 핵심은 "인생은 의미가 없다." 가 아니라 "인생은 하나님 없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입니다. > 놀라운 사실, 아벨의 이름도 '헤벨'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가인의 동생 아벨 의 히브리어 이름 역시  הֶבֶל (헤벨) 입니다.즉 전도서의 "헛됨"과 창세기의 "아벨"은 동일한 단어입니다. 아벨은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

성경이 말하는 부와 탐욕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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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이 말하는 부와 탐욕의 차이 –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욕구는 사랑이 되고, 하나님을 떠나면 욕심이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부를 부정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부 자체를 죄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문제는 부를 얻는 방법과 부를 대하는 마음 에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아 부유하게 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고"(창세기 13:2),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으며"(창세기 26:13), 욥은 하나님께 회복을 받은 후 이전보다 더 큰 복을 받았다(욥기 42:12). 따라서 성경은 부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욕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인간에게는 먹고 살고, 가족을 돌보고, 더 나은 삶을 이루려는 욕구가 있다. 이러한 욕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문제는 욕구 자체가 아니라 그 욕구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떠난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변질되는가에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으로 계시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8) "여호와께서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며." (시편 33:5)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도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도록 부름받았다. 하나님과 하나 된 삶에서는 욕구가 자신뿐 아니라 이웃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욕구는 점차 자기만을 위한 욕심으로 변질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부가 아니라 재물의 지배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여기서 예수님은 돈을 사용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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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4장에서 성도가 어떻게 성숙해 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그 중심 주제가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엡 4:13)입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이 많아지거나 신앙 경력이 오래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의 전인격적 성숙을 의미하며, 그 성숙은 반드시 "사랑"이라는 원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성숙과 대조되는 것으로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욕심"과 그 욕심에서 파생되는 구체적인 죄들을 나란히 제시합니다. 오늘은 이 본문을 세 가지 축, 곧 (1)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과 그리스도에게서 나는 사랑, (2)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욕심, (3) 그 욕심으로 인해 나타나는 열매들로 나누어 살펴보려 합니다. 1.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란 무엇인가 (4:13~16) 바울은 먼저 교회에 주어진 은사들(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의 목적이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고 말합니다(엡 4:11~12). 그 궁극적 목표가 바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엡 4:13)입니다. 이어지는 14절은 그 성숙함이 무엇을 막아주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린아이처럼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15절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바로 "사랑 안에서(in love)"입니다. 성경적 성숙은 진리를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사랑 안에서 말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께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16절은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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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흠 없는 사람이었고,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으며, 산헤드린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5) 이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잘 지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율법의 외적 형식을 완벽히 지킨 사람에게조차,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거듭남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이 짧은 구절을 중심으로, 베드로전서 3장 21절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함께 살펴보며 '물'과 '성령'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물이란 무엇인가 — 육신의 죽음과 선한 양심 먼저 '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히 세례라는 의식 자체로만 이해하지만, 베드로전서는 이 물의 참된 의미를 훨씬 깊이 있게 설명해줍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전서 3:21)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매우 중요한 구분을 짓습니다. 세례의 물은 몸의 때를 씻어내는 위생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례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입니다. 다시 말해, 세례라는 물의 상징은 우리의 옛 자아, 곧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던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고백이자 선언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물속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새 생명으로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이때 죽는 것은 다름 아닌 '육신의 정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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